경계에 흐르다-앞서기 위해 물러선다

인간에게는 이탈의 욕구가 있다. 이탈은 부정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매우 긍정적이며 생산적이기도 하다.
이탈은 정반합正反合의 '반反'에 속한다. 합合을 기약하는 반反은 이탈을 하면서 스스로를 확장한다.
부정否定을 통해 인간은 고정되지 않고 움직인다. 발전도 부정의 한 형식이 빚은 결과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부정이 멈추어 고정될 때 즉 '부정의 죽음'이 발생하면 폐색과 멸망만이 기다린다.
불교에서 말하는 '양공两空', 중현'重玄'이 그것이며 장자는 양행(两行:세상의 모든 합은 같다)을 언급한다.
양자택일에 익숙한 사람들은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을 때도 한쪽만을 택해 장자를 문명 부정론자로 끌고 간다.
노자를 읽는 이들도 '도덕경'에 언급되는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즉 무위하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라고 쓰여 있는데 양자택일의 고수인 그들은 '무위無爲'만 보고 '무불위無不爲'는 애써 외면한다.
노자의 사상은 속세를 벗어난 것이 아니다. 도덕경 7장을 보면 '후기신이신선後其身而身先', 즉 뒤로 물러서지만 결국 앞서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양자택일의 결과 '뒤로 물러서는 것後其身'만 선택한다.

우리는 보통 하나를 선택하는데 익숙하며 은연중에 상대도 그러기를 강요한다. 그리고 선택 후에 그것을 철저히 지키는 것을 순수하고 진실한 삶의 태도로 여기기도 한다. 이단이나 극단주의처럼 말이다.
'지속 부정'을 통해 부정을 살아 있게 해야 하며 이것이 '성숙한 이탈'이라 할 것이다. 한쪽을 택하면 과거에 머물거나 이념화되기 쉽다. 미래로 열린 경계에 서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