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속도에 대한 명상 13-반칠환 #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속도에 대한 명상 13 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반칠환, 중에서 좋은 글 2022.08.04
좋은 글-탄생-박현수 # 탄생 먼 길을 걸어 아이가 하나, 우리 집에 왔습니다. 건네줄 게 있다는 듯 두 손을 꼭 쥐고 왔습니다. 배꼽에는 우주에서 갓 떨어져 나온 탯줄이 참외 꼭지처럼 달려 있습니다 저 먼 별보다 작은 생명이었다가 충만한 물을 건너 이제 막 뭍에 내렸습니다. 하루 종일 잔다는 건 그 길이 아주 고단했다는 뜻이겠지요. 인류가 지나온 그 아득한 길을 걸어 배냇저고리를 차려입은 귀한 손님이 한 분, 우리 집에 왔습니다. 박현수, 시 전문지 중에서 좋은 글 2022.07.22
좋은 글-아버지의 가방-박혜선 # 아버지의 가방 흙먼지 뿌연 몸으로 돌아왔다. 속옷 몇 벌 얼룩덜룩한 작업복과 양말 몇 켤레, 낡은 운동화를 담고 아버지랑 함께 돌아왔다. 돌아와 털썩 신발장 옆에 앉았다 앉은 채 그대로 곯아떨어진다. 박혜선 좋은 글 2022.07.20
좋은 글-벌레 먹은 나뭇잎-이생진 # 벌레 먹은 나뭇잎 나뭇잎은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이생진 중에서 좋은 글 2022.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