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97

좋은 시-의식3-전봉건

#의식儀式3 나는 너의 말이고 싶다. 쌀이라고 하는 말. 연탄이라고 하는 말. 그리고 별이라고 하는 말. 물이 흐른다고 봄은 겨울 다음에 오는 것이고 아이들은 노래와 같다라고 하는 너의 말. 또 그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 불꽃의 바다가 되는 시이트의 아침과 밤 사이에 나만이 듣는 너의 말. 그리고 또 내게 살며시 깜빡이며 오래 잊었던 사람의 이름을 대듯이 나직한 목소리로 부르는 평화라고 하는 그 말. 전봉건(1928∼1988)

좋은 글 2024.03.15

좋은 글-선운사-최영미

#선운사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최영미 아득히 멀어진 20대에 처음 만난 이 시집의 강력한 인상을 잊을 수가 없다.

좋은 글 2024.03.08

좋은 시-외롭다고 생각할 때일수록-나태주

#외롭다고 생각할 때일수록 외롭다고 생각할 때일수록 혼자이기를, 말하고 싶은 말이 많은 때일수록 말을 삼가기를, 울고 싶은 생각이 깊을수록 울음을 안으로 곱게 삭이기를, 꿈꾸고 꿈꾸노니ㅡ 많은 사람들로부터 빠져나와 키 큰 미루나무 옆에 서 보고 혼자 고개 숙여 산길을 걷게 하소서. 나태주 <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중에서

좋은 글 2024.02.08

좋은글-남편-문정희

#남편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는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문정희,『양귀비꽃 머리에』(민음사, 2004)

좋은 글 2024.02.01

좋은글-부부-문정희

#부부 부부란 무더운 여름밤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둘이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너무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 꽃만 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어디 나머지를 바를까 주저하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달에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함께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내 ..

좋은 글 2024.01.29

명심보감-총명한 예지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총명한 예지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지혜가 보석처럼 반짝이며 빛나더라도 그것을 오랫동안 지키기 위해서는 어리석음의 옷을 입혀 두는 게 좋다. 그리고 이룬 공로가 있다면 그것도 마찬가지이다. 겸손으로 감싸 두면 그대의 공로는 늘 함께 할 것이다. 넘친다는 것은 유실되는 것이다. 지혜, 공로, 힘, 용기, 부유함 등이 그러하다. 넘쳐나기 시작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글 2024.01.24

좋은 글-믿음은 별이라서-오규원

#믿음은 별이라서 우리의믿음은작아서 각자달라서 우리의믿음은우리가어두워서 우리의믿음은우리가작아서 너무인간적이라서 우리의믿음은해탈과는너무멀어서 몸은작고여기에서멀리있다 그러나 그러나 믿음이없으면무엇이 이어둠을반짝이겠는가 믿음은별이라서 작아도모두반짝인다 믿음은별이라서 믿음은별이라서 오규원오규원 시인은 관념 파괴, 형식 해체를 주장한 시인이다. 현대시는 새로움 속에서 태어난다는 것이 그의 정신이었다. 그런 실험 정신이 이 시에도 적용되어 있다. ‘믿음은 별이라서’를 보면 띄어쓰기가 없다.

좋은 글 2024.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