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온도

언어의 온도02.글-128 눈물은 눈에만 있는 게 아니다

judy663 2020. 10. 16. 19:25

 

 

 

영화<러브레터(1995): 감독 이와이 슌지, 출연 나까야마 미호 등>

 

 

아련한 그 시절 극장에서 '러브레터'를 보고 나오는 길 촉촉하게 감성이 차 올랐던 그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눈이 잘 내리지 않는 부산에서 접했던 하얀 배경들로 가득한 그 설경들, 첫사랑 가득한 추억들은 지금까지 우연히 러브레터의 OST를 듣게 되는 날이면 자연 반사적으로 그때의 감성을 소환시켜 버린다.

 

2020년을 살아가는 지금 다시 보게 된 영화 '러브레터'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처럼 추억의 보물창고와 같은 느낌이다.

메신저의 지극한 보편화로 화석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손편지, 직접 손으로 이름을 기재했던 도서 대출증, 칠판 아래 그날의 당번을 쓰고 지우던 추억들. 영화를 보는 내내 1999년 처음 이 영화를 보았던 20대에 느끼지 못했던 아날로그 삶이 가져다주었던 마법 같은 행복을 떠올렸다.

 

 

영화<러브레터(1995), 출처 네이버>

 

 

영화 속에는 같은 인물 다른 배역의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처음 영화를 봤을 때의 그 당혹감을 잊을 수가 없다. 머리 스타일 변화조차 없는 1인 2역은 영화를 보는 도중에야 그들이 다르다는 것을 간신히 파악했다.

 

 

영화<러브레터(1995), 출처 네이버>

 

영화의 첫 장면 설원에 누워있던 그녀의 이름은 '와타나베 히로코'이다. 죽은 약혼녀의 추모식에 참석했다가 그의 중학교 졸업앨범 속에서 그녀와 닮은 여자 아이를 발견하고 그가 그녀에게 전한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떠올린다.

그렇게 그녀는 앨범 속 주소로 죽은 약혼자 '후지이 이츠키' 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지금은 국도로 변해버렸다지만 아직 그를 떠나보내지 못한 마음을 담아 천국에 메시지를 보내게 된다.

그 후 생각지 못한 천국의 답장이 정말 도착하게 되고 이 편지들을 통해 누군가는 사랑을 떠나보내고 누군가는 사랑을 깨닫게 된다.

천국에서 온 답장을 보낸 주인공은 '후지이 이츠키'이다. 그녀는 죽은 약혼자의 중학교 시절 같은 반 동명이인이었는데 그렇게 히로코는 편지를 통해 후지이 이츠키가 기억하는 '후지이 이츠키들'의 추억 속으로 초대된다

 
 

 

여학생 후지이의 기억 속 남학생 후지이의 모습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의 연속이었다.

같은 반 친구들의 장난으로 시작된 중학교 1학년 도서부 사서 활동을 시작으로 그들의 추억은 전개된다.

 

 
아무도 보지 않는 책에 처음으로 '후지이 이츠키' 이름 남기기

 

 

 

 

미안하다는 말 대신 자전거 불빛 아래 뒤바꾼 시험지의 답안을 한참 동안 들여다 보기

 

 

 

 

 

자전거를 타는 그녀의 머리에 종이봉지를 씌워버린 심술궂은 장난

 

 

 

시간이 훌쩍 지나 중학교 도서관을 다시 찾은 후지이는
후배들의 도서대출증에 적힌 '후지이 이츠키' 찾기로 이미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후배들이 찾아낸 숨겨진 추억의 조각은 도서대출증 뒤편에 그려진 그녀의 모습이었다.

 

 

 

후배들이 들고 온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후지이가 전학을 가기 전 그녀에게 직접 전해준 바로 그 책이었다.

책 제목처럼 잃어버린 시간 속에 간직된 풋풋한 러브레터는 이렇게 추억이라는 연결고리로 그녀에게 전달되었다.

 

 

 


도서대출증 뒷면에 그려진 후지이의 그림을 보는 순간
책을 부탁하고 나오며 자전거를 잠시 멈춘 그

전학 간 사실을 알게 되어 꽃병을 깨뜨린 그녀
그들의 모습들이 오버랩되며 그 장면들이 잔잔하게 더 가슴속에 들어왔다


편지 속 추억들은 '후지이' 그녀가 미처 느끼지 못했던 첫사랑의 기억들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편지 속 이야기를 통해 '히로코'는 후지이가 조난당한 산을 찾아가 이제는 담담하게 그와의 이별을 고한다.

떠난 사람이 남긴 추억을 통해 한 사람은 그를 마음속에서 떠나보내고 한 사람은 그가 쓴 아련한 첫사랑의 러브레터를 전달받는다.

2020년에 다시 접한 러브레터는 기억 속 명대사

오갱끼 데쓰까?
와따시와 오갱끼 데쓰

보다 더 많은 것들을 남겼다. 20대에 본 러브레터가 풋풋한 첫사랑의 이야기로 남겨졌다면 다시 접한 러브레터에서는 첫사랑과 더불어 섬세하게 그려진 죽음과 이별이 느껴졌다.

2020년을 살아가는 우리의 추억과 감정의 차이만큼 10,20대에게 이 영화는 아련한 추억보다는 어쩌면 조금 따분하지만 신기한 옛날이야기 같은 존재일 수도 있지만 30대 중반을 지난 이들에게는 영화를 보는 잠시 동안이라도 추억을 찾아가는 가슴과 눈이 촉촉해지는 시간을 가져다줄 것 같다.

 


P.S.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고 싶다면


한국 영화 <건축학 개론(2012): 감독 이용주, 출연 이제훈, 수지 등>

 

 

 

 

대만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2012): 감독 구파도, 출연 가진동, 천옌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