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잖아~옷깃만 스쳐도 우린 느낄 수가 있어~ ' (도시 아이들의 텔레파시 가사 중에서)
21세기 2020년을 살아가는 나의 뇌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시기에 흘러나왔던 이 노래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각설却說하고 여기에서 눈빛은 김춘수 님의 시 '꽃' 마지막에 언급되는 눈짓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 그의 몸짓은 나에게 목적 없는 하나의 움직임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하나의 의미로 다가온다. 이처럼 우리는 상호 작용을 통해 눈짓과 눈빛만 봐도 찌릿찌릿하게 텔레파시가 통하는 서로에게 '꽃'의 존재가 되어 간다.

김춘수 님의 시 '꽃'에서는 이름이 매개체가 되어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면 생텍쥐페리의 동화 '어린 왕자'에서는 여우 길들이기, 장미 키우기를 들 수 있다.
소싯적 청소년 추천도서였지만 최근에야 드디어 완독에 성공한 '어린 왕자'를 소개하고자 한다.
청소년 시절 몇 번이나 도전했지만 이해력 부족과 더불어 심오한 내용으로 처음에는 보아뱀 속 코끼리, 다음은 바오밥나무 등 글 속 삽화들만 기억에 남겼다.

어린 왕자는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가 1943년에 집필한 그의 생전 마지막 작품으로 그가 조종사였 듯이 책 속의 주인공도 조종사로 항공기를 타고 사막에 불시착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어린 왕자는 아주 작은 별인 B612에서 거주했는데 다른 별들의 여행을 거쳐 마지막 여행지인 지구로 오게 된다. 사막에서 어린 왕자는 '자신을 길들여 달라'는 여우를 만나고 둘은 소중한 관계를 만들어 간다.
그리고 이 여우님은 책 속에서 수많은 명언을 쏟아내며 명언 장인으로 등극된다.
'내가 날 길들인다면 우리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될 거야. '
'내가 만약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다른 발자국 소리에 난 숨어버릴 테지만 너의 발자국 소리라면 밖으로 나오고 싶을 거야.'
'빵을 먹지 않는 나에게 저 밀밭은 아무런 소용이 없지만 네게 길들여진다면 금빛 출렁이는 밀밭을 보며 너의 금발을 떠올릴 거야.'

그리고 여우는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함을 알려준다.
지구별에서 여우를 길들인 어린 왕자는 여우를 통해 세상에는 수 없이 많은 장미가 존재하지만 자신의 별에서 자신을 길들인 그 한 송이 장미만이 그에게 의미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물을 주고
유리 갓을 씌워 주며
바람막이를 쳐주고
벌레도 잡아준
수많은 시간들이 그들에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와 김춘수 님의 '꽃'에서 이런 의미 있는 관계 맺기는 삶의 의미를 형성하고 삶을 더 풍요롭고 아름답게 가꾸어 주는 역할을 한다.
지금 거리를 걸어가는 수많은 이들은 나에게는 그저 스쳐가는 익명匿名이지만 누군가에는 소중한 관계를 맺은 특별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전국의 수많은 지명 중에 부산의 '양정楊亭'이란 곳은 어떤 이에게는 그냥 낯선 어떤 곳이지만 나에게는 초중고의 추억을 듬뿍 간직한 그때로 응답하게 만드는 특별하며 소중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어느 때보다 비대면이 중시되고 강조되는 요즘이지만 '몸이 멀어지면 맘도 멀어진다'는 말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관계라는 단어를 더 소중히 절실히 다뤄야 겠다.
P.S. 여우님의 못다 한 명언들
사막이 아름다운 건 별이 있기 때문이며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있기 때문이야.
아름다운 건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어.
마음의 눈으로만 보이는 것들 말이야.

어떤 사람들은 말로 마음을 주고받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몸짓으로 마음을 주고받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침묵으로 마음을 주고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직도 마음을 주고받을 줄은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어, 에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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